15 잃은자와 찾은자
15 잃어버린 자와 찾은 자
영혼 구원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시한 일 처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고 한 사람이 구원 받을 때 기뻐하신다.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은 너무나 깊고, 죄인이 회개하는 것에 대한 기쁨은 충만하다.
예수님은 눅15장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그들의 구원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주는 세가지 비유를 말씀 하셨다. 세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고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벧후3:9)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준다.
눅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와 죄인들이 습관처럼 예수님께 나왔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환영 받지 못하는 무리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이러한 광경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크게 괴롭혔다. 또한 사회의 쓰레기들에게는 인기를 얻고 그 반면에 랍비들의 전통에는 비판을 가하는 메시아에 대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한없는 긍휼하심을 대조시키는 이들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뒷짐만 지고 앉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악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찾으시며 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신다. 잃어버린 죄인 단 하나가 구원을 받더라도 크게 기뻐하신다.
백 마리의 양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 내었노라 하리라.” (눅15:4-6)
“너희 중에 누가” 라는 구절은 자비로운 행동이 일반적인 목자들에게도 기대 된다는 말이다. 삯을 받고 일하는 목자 조차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다. 양을 향한 사랑의 문제이기도 하다.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밤중에라도 밖으로 찾아 나설 것이다. 또 찾아서 양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도 벌였다.
이 비유의 핵심은 양의 구원을 기뻐하는 목자의 기쁨이다. 목자는 조용히 혼자만 기뻐할 수 없었다. 목자의 기쁨은 충만하고 흘러 넘쳤다. 그래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만 했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찾으시는 목자이시다. 잃어버린 영혼을 너무나 기다리시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그들을 찾으실 것이다. 길 잃은 양이 우리로 돌아올 때에는 천국마저도 하나님의 기쁨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이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열 개의 동전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8-10)
동전 하나를 잃은 여인은 온 집안을 쓸면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찾았다. 동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은 목자의 기쁨만큼 컸다. 목자와 같이, 여인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절)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감동 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찾으셔서 회개에 이르도록 하시는 사람들의 구원이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에스겔33:11)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62:5)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영혼의 구원을 바라보시는 방법이다.
두 아들 :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눅15:11~32)
이 비유도 요점은 동일하다. 사랑의 아버지는 잃어버렸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온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방탕한 아들이 결정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 자기의 처지에 대한 슬픔이었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슬픔 자체는 회개가 아니었지만 깊은 회개로 인도해 주었다. (고후7:9-10 참조) 아들은 자기의 필요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가 육신의 아버지께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렸음을 기억한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깊이 깨달았다.(눅15:18)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아버지에게 자기를 종들 중 하나로 고용해 달라고 요청 하려고 했다(19절).
여기에 회개하는 믿음의 완벽한 예가 있다. 이 젊은이의 무조건적인 순종과 비참함을 무릅쓰는 겸손, 그리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든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나타냈다. 아버지의 상속재산을 요구하던 방탕한 아들이 이제 계약노예로 아버지를 섬기고자 했다. 아들의 태도는 무조건적인 순종이었다.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아들의 회개는 완전했다. 아들은 영적으로 가난해 졌다. 자기의 죄를 슬퍼했다. 오만함이 유순함과 겸손으로 바뀌었다.
아들이 집에서 먼 곳에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환영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빨리 알아본 이유는 아들을 기다리며 돌아오기를 집 밖에서 먼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죄인을 찾으시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죄인은 하나님이 이미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달려가 맞이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와 끌어 안으시는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리석음을 잊어 버렸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것이었다. (눅15:24)
이 세 비유는 공통된 주제이다. 즉 찾는 자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기뻐한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찾는 자는 죄인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추한 반전을 이루어 질투하는 형을 만나게 된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5-32)
큰 아들은 아버지가 방탕한 동생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나고 질투가 났다. 큰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긍휼함이 전혀 없었으며 바리새인과 똑 같았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었다.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자기가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었다 (눅15:29). 여기에 또 다른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도 찾았다. (28절)
주님은 언제나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자로 여겨야만 했다. 종종 불경건하고 반항하는 죄인들이 더 빨리 자기의 부패함을 깨닫는다.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회개를 모른다. 죄인이 죄를 고백할 때 기뻐하기 보다는 비난한다. 자기의 의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순종하고자 하는 인식이 없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죄를 보고,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 할 수 있는 특권을 저버렸다. 동생과 같이 잃어버린 자였지만 너무 교만해서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다.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두 팔 벌려 달려 나오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