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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릎 꿇음' 존맥아더

제 3 부 예수님이 복음을 비유로 가르치시다

제 3 부 예수님이 복음을 비유로 가르치시다


11 네 가지 땅
“내게로 오라.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30)라는 예수님의 초청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한 단계를 마무리 하면서 동시에 더 넓고 개인적이며, 복음 전도에 강조점을 두는 사역의 시작을 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후 바리세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극도의 증오가 폭발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왕도 거부하고 그 왕이 제시하는 나라도 거부했다. 이날부터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이 바뀌었다. 예수님의 초청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주 되심이라는 멍에를 메라는 것이었다.
이 날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비유, 즉 영적인 실재를 묘사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가르치셨다.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선포하는 대신 이미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애매하게 말씀 하셨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밀”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유대인이 상상하던 나라는 메시아가 온 나라를 통치하는 지상의 영원한 나라였다. 그러나 마13장의 비유의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숨기고 참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시하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오직 믿는 자들 사이에서만 통치하신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구속 받은 모든 사람들을 품고 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태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신비한 나라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다. 
예수님은 마13:3-9 말씀을 통해 길가에 떨어진 씨앗,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네 가지 종류의 땅은 우리의 마음상태를 비유하신 것이다.

길가의 땅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13:4)”
이 흙은 발에 밟혀 단단하게 굳어졌으며, 경작되지 않았으며, 쟁기질 하지 않은 단단한 땅이다. 여기에 떨어진 씨앗은 새가 먹어버릴 때까지 그대로 그냥 땅 위에 있는 것이다.


얕은 땅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13:5-6)”  뿌리가 더 깊게 내려가지 못하면 어린 식물들은 무성한 잎을 내지만, 해가
나오면 뿌리가 습기를 흡수하지 못해 금방 말라 죽는다. 열매 맺기 한참 전에 시들게
된다.    

잡초가 무성한 땅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마13:7)”
 깨끗하고 준비가 잘 된 것처럼 보이는 땅이지만 표토 아래 숨은 강인한 잡초들의 뿌리
가 이들의 생장을 막아 버렸다.

좋은 땅
부드럽고 깊고 깨끗한 땅이다. 
이 땅에서는 씨앗이 생명을 틔워서 많은 결실을 얻게 한다.

비유
이 이야기를 이해 했으면 그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가르쳐 주는 왕이 있는 사람들 뿐이다.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깨달았을 것이다.  마13:9에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고
하셨다. 

씨와 씨 뿌리는 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는 문자적인 씨가 아니라 복음이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8:11)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는 각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음의 씨를 심는 사람이다. 씨는 창조되지 않고 다만 번식 할 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뿌리고 번식하고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씨를 창조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좋은 씨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복음전도란 있을 수 없다.

땅의 상태
땅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다. 땅의 차이는 그것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와 관련이 있다. 
적절히 준비되어 있다면 모든 땅은 씨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적절히 준비되지 않은 땅은 곡식을 낼 수 없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주로 그 사람의 마음의 준비상태에 달려있다. 
적절히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반응하지 않는 마음 
길가의 땅은 완고하고 반응이 없는 사람을 그려준다.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 목이 곧았다(잠29:1)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반응하지 않고, 관심이 없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냉담하고, 무시하고, 적대적이다. 이런 사람은 복음과 관련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사탄은 씨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채 가려고 하는 굳은 땅 위를 맴도는 굶주린 새로 묘사된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이 죄의 홍수에 너무나 시달려서 복음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해 질 수 있음을 경고 하신다. 이러한 마음은 회개도 없고 죄를 애통해 함도 없고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이 없는 마음이다. 이것은 잠언에서 묘사하는 어리석은 자의 마음이다. 지식을 미워하고, 가르침을 싫어하고, 지혜를 멸시하고, 자기의 마음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듣지 않으려 하고, 마음이 닫혀있어 초청에 의해 방해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드시 반 종교적인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고한 사람들도 참 종교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죄가 그 사람을 너무나 단단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종종 약간의 씨를 받게 되지만 삶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피상적인 마음
얕은 땅은 피상적이고 충동적인 마음의 반응을 묘사한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 날 때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0-21)”.  이러한 믿음은 열광적이지만 깊이가 없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제자도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급하고, 감정적이고, 자아도취적이고, 즉각적인 흥분이다. 참된 믿음이 아니다. 피상적인 반응은 복음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힘든 요구를 배제한 채 주로 기쁨과 열정, 친교, 좋은 감정 등에 대한 약속과 함께 전해지는 21세기 기독교에 만연해 있다. 참된 회개도 없고, 상함도 없고, 애통함도 없는 부드러운 표토 아래에 숨겨진 반역의 암석층은 길가의 땅보다 훨씬 단단하다. 그 결과는 영원한 비극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성한 잎을 지탱해 줄 뿌리가 없으므로 시험이나 핍박이 찾아올 때 곧 메말라 시들어 버린다 
회개나 겸손에 대한 인식이 없이 항상 웃음과 기쁨만 있는 회심을 경계하라. 그것이 곧 피상적인 마음의 특징이다. 그런 마음은 혹독한 날씨를 견디는 뿌리가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깊은 상실감으로부터 자라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내적인 확신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깨끗게 하시고 순결하게 하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열망을 갖추지 않는다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육에 필요한 뿌리가 없는 것과 같다.

세속적인 마음
잡초가 무성한 땅은 세속적인 것들에 관심을 빼앗긴 마음이다.  마13:22 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신다. 잡초가 많은 마음은 명성, 외모, 돈이 전부이다. 이들은 영적인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한다. 이들은 헌신하지 않고, 세상의 즐거움과 육신의 정욕에 몰두하므로 순결한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잡초가 무성한 땅의 반응이다. 이들은 구원을 가져본 적 조차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떨어진 것이다. 잡초가 많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않았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곡식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서 잡초와 가시를 제거해야만 한다. 

원수
잡초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다(마13:22).  말라 죽게 하는 태양은 우리 육신에 호소하는 편안함에 대한 도전인 환난과 박해이다. (마13:6,21)  새들은 악한 자(마13:4,19) 즉 싹트기 전부터 훔치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사탄이다. 이들은 모두 복음의 원수들이다.   
그렇지만 거두시는 주님이 가장 단단한 땅마저도 부수고, 가장 억센 잡초들도 뽑아버리실 것이다. 좋지 않은 땅이 항상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가장 완고한 마음의 땅도 갈아 엎으실 수 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성령께서 땅을 갈아 씨를 심으심으로 뿌리가 내리고 영광스런 열매를 맺는다.

받을 만한 마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마13:23)”  들판에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이 낙심한 제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이러한 땅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열매
열매를 맺는 것이 농사의 목적이다. 이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시험이기도 하다. 영적인 열매가 없다면, 또는 열매가 나쁘다면 그 나무는 틀림없이 썩었을 것이다. 땅이 곡식을 내지 않으면 그 땅은 쓸모 없는 땅이며 구속 받지 않은 마음을 상징한다. 오직 좋은 땅만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 땅은 농부에게 가치가 있다. 좋은 땅은 신자를 묘사한다. 잡초가 무성하고 얕은 땅은 신자인 체하는 사람들이고 길가의 땅은 완고한 거부자들이다. 
잎이 아닌 열매가 참된 구원의 특징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다. 모든 좋은 땅이 똑같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차이가 있다. 각 사람은 어떤 정도에서든지 열매를 맺는다. 신자들도 불순종하고 죄를 짓지만 궁극적으로 신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알게 될 것이다. 신자들의 열매 맺는 정도는 각각 다르지만 열매를 맺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불신자들과 분명하게 구별해 주는 것은 열매 맺는 능력이다.
씨 뿌리는 자들로서 우리는 더렵혀지지 않은 복음의 씨를 뿌리라고 부름 받았다. 잘 준비되지 않은 땅에 뿌려진다 할지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 언제나 길가의 땅, 얕은 땅, 잡초가 무성한 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도 있을 것이다. 잘 준비된 땅에는 오직 바른 씨가 뿌려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