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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릎 꿇음' 존맥아더

19 의롭다 하심의 약속

19 의롭다 하심의 약속

예수님의 산상설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는 말씀대로 의의 척도가 절대적 완전함이라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고 하셨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들 메시지가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부자관원의 이야기, 그 관원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생각한 바리새인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몹시 어려우니라(19:23)”고 하셨다. 제자들이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19:25)”라고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고 하셨다.

구원은 죄 많은 인간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지 않으시면 우리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6:44-45). 인간의 의지에서 믿음을 끌어올릴 수도 없다. 또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기준에 만족하도록 완전한 의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없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신의 사소한 죄까지도 용서를 구하는 양심적인 수도사였지만 자신이 완벽한 의의 기준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1:17)”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자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치료의 빛이 비쳤다고 말했다. 루터가 찾은 치료약은 이신칭의교리였다. 즉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가 회개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온 모든 사람의 의로 완전하게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칭의 교리는 바울이 하나님이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당신의 의를 사람들의 것으로 간주하셔서 은혜로 구원하셨다고 증명한다. 공로에 근거해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첫 조상이 타락한 이후 구원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4:3)”

 

칭의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기초가 되는 주제였다.

18:9-13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듯이 기도 했고,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애통해 하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셨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 하셨다.(18:14)

이 비유는 칭의가 즉각적임을 보여준다. 시간의 간격이 없었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 전에 행해야 하는 참회행위, 예식, 신앙고백 의식, 공로가 될 만한 행위가 전혀 없었다. 세리는 그 순간(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칭의는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완전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죄인의 불의한 것들을 용서하시고 그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신자를 모든 저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요소에는 전가된 의, 죄의 용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 하나님의 진노의 파기가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칭의가 법적 판결임을 보여준다. 칭의는 죄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실재다. 칭의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즉각적인 신분의 변화다.

그러나 칭의문제에 관해 피해야 하는 두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칭의를 성화와 혼돈하지 말라. 성화는 하나님이 신자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아니라, 죄인의 성품의 변화를 포함한다. 카톨릭 신학은 성화를 칭의의 한 측면에 포함시킴으로써 즉각적인 칭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심각한 것은 신자의 불완전한 의를 칭의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칭의와 성화를 너무 극단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둘 중 하나가 없는 다른 하나를 인정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은 도덕률 폐기론의 오류이다. 하나님은 성화하지 않는 사람을 의롭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칭의를 구원의 독립된 수단으로 주시지 않는다. 칭의는 따로 떨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전부를 대변할 수 없다.

 

전가된 의

칭의의 토대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전가된 의라고 부르며 이것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기독교와 타 종교를 구분 짓는 진리이다. 신학자 제임스 뷰케년은 하나님의 저주 선고는 오직 하나님의 사면 행위에 의해서만 취소될 수 있다고 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2:10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기록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많이 해도 우리의 죄를 상쇄 시킬 수 없다. 죄를 범한 사람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대속이 있어야만 한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반드시 치러야 하는 형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6:23)”.

그러나 죄인들의 자기 죄에 대한 대속으로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죄책이 사라진다 해도, 죄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미치지 못한다(5:20, 48).

전가된 의가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대속을 이루셨다. 이 대속이 용서를 제공해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것 같이, 이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이 먼저 죄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선한 것 때문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때문에 가능하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니(4:5).”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4:1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9)”

 

죄의 용서

칭의는 또한 죄의 용서와 사면을 보증한다. 죄가 요구하는 형벌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전히 치러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4-26)”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우심을 훼손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용서하시고자 하신다. 완전한 대가가 치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런 흠 없는 믿음의 죄인들을 받아 주실 수 있다.

 

새로운 신분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4)”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세리의 신분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회개를 하는 세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만 하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에 근거해서 의롭다 하심을 구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충분한 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가된 의를 필요하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 그때부터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철회

칭의는 저주의 반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이신칭의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만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결정 된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사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7:24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저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예수님 비유의 이 세리도 마태와 삭개오처럼 칭의가 자신을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줄 유일한 위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칭의와 신자의 삶

터무니없이 불의하게 살면서도 칭의의 약속에 안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짓 안정감이 드러난다.

이신칭의가 방탕한 삶의 길을 열어주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0)”라고 바울은 반박한다. 바울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님을 보증한다고 논증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15:6-7).”

주님이 말씀하신 칭의는 주님이 말씀하신 풍성한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10:10참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7:38).”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은 칭의뿐 아니라 성화,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 영생의 복을 가져다 준다. 구원은 단순히 단회적인 법적 사건이 아니다. 칭의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1:7참조). 칭의는 반목을 대신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다 준다(5:1). 또한 영생의 소망을 따라 우리를 상속자가 되게 한다(3:7). 이것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시작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그분과 함께 영화롭게 하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다(8:29-30 참조). 이것은 예수님의 전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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