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구원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마7:13-14)”
각 사람은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성경은 여러 방법으로 이 선택을 보여준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30:19).”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24:15).”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하나님께서 예레미아에게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렘21:8).”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일시적인 결심이 아니다. 그것은 영향이 계속되고 영원한 결과가 뒤따르는 최종적인 결정이며 확정적인 결심이다. 예수님이 친히 각 사람의 운명의 갈림길에서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신중한 선택을 하라고 요구하신다. 주님은 각 사람이 쉽고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세상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어려운 길을 따라 주님을 따를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 하신다.
넓은 문과 좁은 문, 넓은 길과 좁은 길, 생명의 방향과 멸망의 방향, 적은 자들과 많은 자,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바위 위의 기초와 모래 위의 기초. 선택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결단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모두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각자는 어느 길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
두 개의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또한 바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좁은 길로 열려있는 문은 오직 하나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10:9)”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문을 통하여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요10: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그리스도가 문이시다. 그리스도가 길이시다. 천국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중간 길도 없고 제3의 대안이나 다른 문도 없다. 선택은 두 가지다. 진리와 거짓, 옳은 것과 그른 것,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다. 성경적인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공로, 즉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고전15:3).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음을 보여주셨다(고전15:20). 구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낼 수 있는 공로 체계가 아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얻어내기에 충분한 선행을 할 수 없다(롬3:10-18). 모세의 율법은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죄 많고 불순종하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롬3:20). 하나님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신다(롬3:21-24).
따라서 선택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한 허다한 종교들과 하나님의 공로에 근거한 하나의 종교 사이에 있다. (롬4:4-5 참조)
좁은 길과 넓은 길은 종교와 무종교를 대조시키거나, 방탕한 부도덕에 맞서는 기독교를 제시하거나, 하등종교에 맞서는 고등종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공로와 인간의 공로 사이에 있다. 넓은 길은 좁은 길과 같이 ‘천국’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어도 결코 천국으로 통하지 않는다.
사탄은 속임수의 명수다(고후11:14). 문을 화려하게 색칠하여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보이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주님은 바른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 하신다. 마치 회전문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이 문을 통과 할 수 있다. 무리에 휩쓸려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힘쓰라”는 단어는 힘들고 격렬하고 의도적인 싸움(agonizomai)을 의미한다. 딤전6:12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싸움, 전투이다. 극렬하고 맹렬함이 암시되어 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6)”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4:18)”라고 구원이 쉽지 않음을 말했다. 구원은 쉽지 않다.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4)”는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만일 사람이 부지런히 문을 찾지 않으면 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아 29:13에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싸구려 은혜, 안일한 복음주의와 조화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온 마음으로 그 나라를 찾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지 않다. 부자 청년 관원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돌아서고 말았다. 우리가 언제 좁은 문에 이르렀든지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자기 의, 이기심, 죄, 물질주의 등 불필요한 짐들은 그 문을 통과 할 수 없다. 그러나 복된 소식은 그 문이 아무리 좁다 하더라도 죄인 중의 괴수마저도 받아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다는 것이다(딤전1:15참조).
계속 짐을 가지고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넓은 문이 매력적일 수 있다. 그 문에는 ‘천국’, ‘예수’ 라고 적혀 있을 수 있지만 천국으로 향하지 않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활짝 열린 문이다. 자기 의, 교만, 물질의 소유, 죄마저도 버리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넓고 활짝 열린 문이다. 이 문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전적인 변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옛 것은 지나간다. 죄와 이기심과 세상의 즐거움은 새것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구원의 요지이다. 구원은 변화된 삶을 낳는다.
두 갈래 길
두 갈래 길은 두 개의 문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 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넓은 길이 분명히 있다. 쉽고 벼랑이 없다. 어떠한 제한이나 경계도 없고 대충 빈둥거릴 수도, 흘러가는 물을 따라 떠다니는 물고기처럼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준다.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고 종교적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세상풍조(엡2:2)” 이며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16:25)”이다.
하나님의 길은 협착한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여기에는 일탈이 없으며 자기 주도적인 무리들이 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은 무리를 찾지 않으신다. 자기가 잃어버린바 된 것을 아는 사람들만 찾으시고 구원하신다. 또한 주님은 주님의 구원열차에 올라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라고 반드시 초청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추종자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드리는 사람들을 원하신다(요6:64-6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주님은 정말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군중으로부터 물러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요구하심으로써, 즉 고난과 죽음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심으로써 좁은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드신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핍박도 예상해야 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그 길은 거칠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 사람은 그때 그 자리에서 지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도 반격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당신의 생명을 요구 할 수도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실제로 당신의 생명을 요구한다. 소심한 자들, 타협하는 자들은 지원할 필요가 없다. 여행하기 무서운 길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길을 인도하시며 그 여정을 끝내는데 필요한 힘을 공급 하신다(빌4:12-13참조).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마11:30).
두 방향
두 갈래 길과 두 개의 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은 영원을 위한 선택이다. 쉽고 재미있고 넓은 길은 끝이 어렵다. 유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영생을 향해 있다. 이 길은 힘들게 시작하지만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향해 열려있다.
두 부류의 무리
마태복음7:13-14은 넓은 문을 들어가는 자가 많고 좁은 길에 대해서는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한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향해 간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실이다. 구약성경에도 참된 신자들은 결코 다수가 아닌 오로지 남은 자들뿐이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셨고, 눅12:32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다. 믿음이 있는 남은 자는 언제나 적은 무리였다. 자기의 인간적인 무능력을 알지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수고하는 소수의 영혼들이었다.
넓은 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연스런 선택이다. 사람들은 의보다 죄를 선택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고 말씀 하셨다. 자신의 죄와 소유물 위에 예수님을 덤으로 얹음으로써 스스로 종교적이라 느낄 수 있다. 자신을 부인 할 필요도 없고 십자가를 질 의무도 없다. 문제는 이 자연스런 길이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인기 있는 복음전도 메시지가 실제로 사람들을 이 속임수에 빠지게 한다.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의 삶을 위한 근사하고 편안한 계획을 약속한다. 십자가의 수치를 배제시킨다 (고전1:23, 갈5:11). 그리스도가 길과 진리라고 말하지만 좁은 문이나 좁은 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 사람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지만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메시지는 사랑과 이해로 가득하지만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회개에 대한 권고도 없고, 심판에 대한 경고도 없으며, 애통함으로의 초청도 없고, 뉘우치는 마음에 대한 기대도 없고,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해야 하는 이유도 없다. 그 메시지는 그저 손쉬운 구원과 성급한 결심에 대한 촉구, 건강과 행복과 축복에 대한 거짓 약속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아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 제시하는 유일한 길이다. 쉽고 인기 있는 길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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