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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릎 꿇음' 존맥아더

21. 심판의 확실성

21. 심판의 확실성
이신칭의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이 교리가 거룩한 삶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반박했다. 만일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가 오직 믿음에 기초하여 죄인들에게 전가된다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방식대로 아무렇게나 살면서도 천국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눈에 완전하게 의로워진다면 신자들은 실천적 의를 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화가 모든 참된 신자의 삶에서 필수적임을 증명함으로 이에 답변했다. 장 칼뱅(John Calvin)은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을 유일하게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다. 그러나 동시에 성화를 붙잡지 않으면 이 믿음을 붙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심 없이는 아무도 의롭다 일컫지 않으신다”고 했다. 
주 되심 구원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신칭의에서 거룩함은 비본질적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성화가 바람직하고 중요하기도 하지만, 칭의의 문제와는 무관하며 영원한 구원에도 불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칭의의 법정적 요소를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전부라고 본다. 모든 신자가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성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벗어난 견해이다.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다. 사람은 거룩함과 순종을 거부하면서 영생만을 꼭 집어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의롭다 하실 때는 거룩하게도 하신다. 
히12:14절에서 성화가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킹 제임스 번역본). 이 구절은 거룩함이 칭의의 분명한 결과라고 말한다. 성화는 구속 받은 모든 사람들의 특징 일 뿐, 구원 받는 조건이 아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거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거룩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거룩하게 될 것이고,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거룩할 수 없고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뿐이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소망이 없다.        
마7:21-23에서 심판 날에 천국이 자기네 소유가 되지 않을 무서운 말씀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구원을 단순히 법정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실천적 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경고대로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마5:21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거하게 될 사람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한다. 만일 사람이 불순종의 삶을 살면 그가 무슨 말을 했던 무슨 선한 일을 했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을 보자. 첫째, 믿음을 고백하지만 믿음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 하는 것 (마7:23-23). 둘째,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 (마7:24-27)이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 : 공허한 말의 죄
심판 날에 쫓겨날 “많은”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님에 주목하라. 그들은 모두 사람의 공로라는 넓은 길과 넓은 문을 택한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리새인에 더 가깝다. 믿음에 기초한 의를 실천하기 보다는 외형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얻어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롬10:5-10 참조). 이들이 행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는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7:21). 이들은 바른 말을 알기도 하고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지만 인격이 따르지 못한다. 건전한 교리는 인정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오늘날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과 같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행하는데 바빴지만 이들의 말은 공허하다. 
참된 믿음은 참된 교리의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의 사역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을(롬8:16), 구원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확신을(요16:8-9)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아시지만 우리는 모른다. 사람들의 구원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자기의 구원에 대한 일시적인 의심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자기 성찰을 하라고 말씀한다. 고후13:5에서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한다.
현대의 많은 거짓된 자들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삶이 어떠하든지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 줌으로서 위선과 불순종, 죄의 삶을 살도록 부추기고 자기 성찰을 방해한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위배된다. 우리는 주의 성찬을 대할 때 마다 자기를 돌아 보라고 명령 받았다(고전11:28).
교회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으로 보이려는 위선자들, 믿음이 의미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살아내지 않는 명목상의 피상적인 교인, 교회 활동에 깊숙이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일부, 하지만 이들은 모두 복음의 사실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단, 교회, 기관에 헌신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헌신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안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마7:22)이 심판 날에 쫓겨 날 것이다.
말씀을 전하고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참된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라. 하나님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고, 또한 종종 일하신다. 하나님은 회심하지 않은 발람(민23:5)과 심지어 발람의 나귀도 사용 하셨다. 사악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요11:51-52). 마24장은 거짓 그리스도인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탄은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다. 불신자들이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속이기 위해 거의 모든 일을 할 것이다.
기적과 예언, 능력 있는 기사들이 거룩한 삶인 것은 아니다. 참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히12:14).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원하신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하나님이 그 속에 거하시는 사람은 날마다 더 거룩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하시므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음 : 공허한 마음의 죄    
 주님은 마7:24-27에서 임박한 심판의 위험을 경고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비유는 지식으로 가득한 머리만 있고 가슴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질책이다. 이 이야기는 순종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대조 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듣고 메시지에 따라 행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주님의 분명한 교훈은 이 두 사람의 차이가 영원한 결과를 낳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 차이점은 집들이 세워진 기초이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외형에만 관심이 있는 위선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었고 외형적으로 근사 했으나 결국에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헛수고였다.  
 예수님은 겸손, 회개, 온유, 의에 주림, 자비, 순결의 촉구를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가치를 경멸했다. 그들은 교만, 영적 오만, 자기 의,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upon them)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견고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그러 하리라(골1:23).”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4)” 이 구절들은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받고 또한 계속해서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현대의 복음전도의 대부분이 죄를 돌아볼 시간이나 깊은 회개를 할 기회, 우리가 왜 잃어버린바 됨을 확신해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성령께서 일하실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기가 잃어버린바 되었음을 전혀 느끼기도 전에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얕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땅을 깊이 판다. 책임을 생각한다.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곧 그것을 하기를 원한다. 그 사람이 바로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심판 날은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바람과 비와 홍수다. 듣고 순종했는지, 그리고 의로운 삶이 믿음의 고백에 수반되었는지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믿음이 순종을 낳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고는 무섭다. “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분명히 철저한 차이를 요구한다. 단순히 새로운 견해가 아니라 완전한 헌신이란 반응 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의 설교 스타일을 분석한 것뿐이었다. “놀랐다”는 반응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는 반응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지옥에 관해 그렇게 무서운 경고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 얻는 반응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모래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회개도 없었고 순종의 표현도 없었다. 다만 설교 분석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된 신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은 채 돌아서지 않는다. 신실한 자들의 반응은 충격 이상이다. 놀라는 것 이상이다. 존경하는 것 이상이다. 그들은 순종한다. 견고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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